Book: 기계 속의 악마
오래전에 사서 책장에 꽂아두고 잊혀져 있던 책이다.
집에서 멀리 있는 얼라인디 본사 사무실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올해는 조금이라도 책을 읽어봐야지!" 하는 야심찬 생각으로 무슨 책들이 있나 뒤적뒤적이다가 "생명에 대한 이야기라고?", "물리학자가 쓴 책이라고?", "물리학자가 썼다는데 왜 다윈주의가 있고, 양자생물학이 있고 그래?" 라는 생각과 함께 흥미가 돋아 꺼내어 가방에 담았다. 그리고 집에 와서 한 30분 정도 읽다가 바로 재단기+북스캐너 행을 결정했다. PDF 로 만들어두면 가지고 다니기 편하니까. 스캔하고 ibooks 에 넣고 짬짬히 시간날때마다 보니 5일정도 걸려서 한바퀴 다 돌았다.
책 내용보다는, 인상적인 통찰이나 급진적인 생각, 다음 책을 고르는데 도움이 될 만한 것들 위주로 정리를 해 보자. 좀 두서가 없더라도, 나중을 위해 지금 생각나는 것 들을 바로 적어둔다.
저자는 폴 데이비스 라는 물리학자이다. 잠시 위키피디아에서 어떤 분인지 찾아봤다.
In 2005, he took up the chair of the SETI: Post-Detection Science and Technology Taskgroup of the International Academy of Astronautics. Davies serves on the Advisory Council of METI (Messaging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
와우, SETI 프로젝트를 하셨다. 그리고,
Davies' research interests are theoretical physics, cosmology and astrobiology;
관심분야는 이론물리학, 우주론, 그리고 우주생물학. 그냥 이론물리학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주생물학까지 커버하는 분이시다. 그래서 생물학의 깊은 주제들에 빠삭하셨던 거였다.
책 전체적으로 다루는 주제는, 생명이란 무엇인가? 마음(=의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에 대해서 아직 답은 없지만, 답을 찾으려는 여러가지 노력, 사고실험, 최근의 연구결과 등을 소개하면서 본인이 생각하는 가설들을 펼쳐놓는다. 저자가 펼쳐놓은 여러가지 연구결과 중에 나도 "읭?" 싶은 것들이 있어서 구글링과 다른 책 검색 + o1 pro 와 심도깊은 대화를 종종 하기도 했다.
도입에서부터 이야기하지만, 저자는 생명을 비생명과 구분하는 큰 차이를 "정보" 에서 찾는다. Computer Science 전공자로서 흥미로운 시작이다. 책을 끝까지 읽어봐야지 생각하게 된 도입부. 잘 쓴 책이네.
그리고 나서 맥스웰의 악마(책 제목의 악마가 바로 이 악마다)를 계속 등장시키며 열역학 제 2법칙을 깰듯 말듯 깨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정보가 물리적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정보가 물리적이다, 라는 문장은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저자가 공들여 설명하는 내용을 보다 보면 "그래서 정보가 에너지라는거야?" 라는 생각이 들듯 말듯 하다. 정보의 처리가 필연적으로 물리적 프로세스를 수반한다는 것과, 정보 자체가 물리적 실체라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나는 전자라고 생각하면서 책을 읽고 있는데, 종종 후자같은 이야기들을 은근슬쩍 섞어놓곤 해서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나는 정보 자체가 에너지, 혹은 물리적 실체라고 보진 않는다.
저자가 정보가 물리적이라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란다우어의 원리 를 꺼내들었던 부분은 꽤 흥미로웠다. 정보과학을 하는 사람인데, 이런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내 가방끊이 짧은게 느껴졌다...
책을 읽으며 신선하다고 느낀 것은, 우리의 유전 정보는 ACTG 로 인코딩 되어 있는데 이것이 코드냐 데이터냐(CS 전공자라면 바로 알아들을 것이다)에 대한 논의다. 생명을 만들어내는 프로세스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코드라고 볼 수 있지만, 복제되며(=에러까지도) 증식한다는 것은 데이터같은 동작이다. 코드와 데이터 영역이 따로 나뉘어 있지도 않은 것 같고(이것은 아직 검증된 것은 아니지만), 코드이면서 동시에 데이터인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일단 읽고 나니 CS 전공자로서는 이해하기 쉬웠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복잡하고 정교한건지도 ... 코드를 출력하는 코드(ex: 컴파일러), 복사하다 일부 영역이 삐끗해도 좀 다르지만 그래도 어쨋든 동작하는 코드(맙소사!!) ... (이런 것에 흥미를 느낌다면 SICP 를 읽고 연습문제를 풀어보길 추천) 그리고 코드와 데이터가 구분되지 않는 시스템을 이야기하며 Halting problem 을 언급한다. 모종의 규칙이 시스템을 이끌어갈 때 이 시스템이 발산할지 수렴할지, 혹은 움직임을 멈추게 될지 영원히 움직일는 미리 알 수 없다는 것. 이 시스템을 생명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읽어보면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이건 신선하다기보다는 여기서도? 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었다. 내가 CS/CE 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중 하나라고 생각하는건데, 요기서 또 나오네.
전체로서의 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하기 위해 그 모듈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는 것이 꼭 필수적이지는 않다.
는 것. 이 이야기는 책 전체적으로 여기저기에서 자주 언급된다. 아마도 환원주의와 구분되는 포인트라서 강조하는 것 같기도 하다. CS 전공자라면 알 것이다, 저것은 Abstraction(=추상화) 에 대한 이야기다. 다른 말로 다시 써보자.
파이썬 코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파이썬 인터프리터의 구현을 알 필요가 없다. 그 아래 레이어인 기계어, 혹은 전자신호들이 어떻게 동작하는지도 더더욱 알 필요가 없다.
는 것. 물론 알면 좋지만, 몰라도 추상화 레이어 위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기계어를 할 줄 알아야 개발자라고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다른 과학/공학 영역에서는 다를 수도 있을테니... 저자는 추상화 레이어가 만들어지면, 그 레이어에서 일어나는 동작을 면밀히 관찰하는 것으로 시스템을 이해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미시세계를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는거야? 싶어서 좀 더 읽어봤는데, 앞뒤 문맥을 보면, 생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우레벨 메커니즘(=하드웨어) 뿐 아니라 하이레벨 메커니즘(=소프트웨어, 생명이 만드는 정보흐름)도 이해하는게 필수적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니까 추상화 없이 그냥 돋보기 들고 아래만 본다고 이해할 수 있는게 아니다. 적당한 곳에서 abstraction layer 를 찾아서 그 위의 high-level structure/process 를 찾아야 한다는 것. 세부적인 내용들은 좀 구멍이 있는 것 같지만, 각 추상화 수준에서 보는 시스템의 동작이 다르다는 것은 납득할 만 하다.
그리고 나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지만, 핵심 주장은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크다
는 이야기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아래 같은 이야기를 한다.
...
더 높은 수준의 시스템이 그 성분들보다 실제로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할 수 있다.
...
오로지 행위자 수준(=추상화 수준을 의미)에서만 존재하는 인과적 관계들이 있을 수 있다.
...
그리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통합정보이론 IIT(Integrated Information Theory) 으로 이어진다. 책에서도 이야기하지만 통합정보이론의 중심 생각은
뇌와 관련해서 부분의 합보다 전체가 더 크다고 보는 직관적인 관념을 정밀하게 수학적으로 포착해보자는 것
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는가?
그리고 나서는 흐지부지 가능성을 열어두고 책은 종결된다. 아무래도 IIT 에 대한 책을 이어서 읽어보라는 뜻인가보다. 사실 열어둔 가능성 (=우주의 규칙이 생명 친화적이라거나...)은 좀 논란될만한게 있긴 하지만, 중요한건 아닌것 같으니 패스.
결국, 이 책은 돌고 돌아서 통합정보이론에 대한 밑밥깔기였다.
이렇게 정보 자체에 대해서 진지하게 다루는 텍스트를 오랜만에 보아서 그런지 관련 자료들도 열심히 찾아보면서 재밌게 읽었다. 그리고 저자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책으로 생명 그 자체의 감각 | 크리스토프 코흐 - 교보문고 를 샀다. 그리고 재단기로 해체하고 바로 pdf 구워서 ibooks 에 넣음... 저 책의 부제는 Why Consciousness Is Widespread but Can't Be Computed다. 흥미진진.
유사과학, 사이비라는 이야기도 듣지만, 의식의 발현에 대한 이론은 안 그럴 수가 없다는 생각. 일단 재밌으니까, 여기로 넘어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