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타와 프랙탈

꽤 오래 전에 만화책인 줄 알고 샀다가 낚였다고 생각한 책이 있다. 파스타의 기하학 이라는 책이다. 왜 이게 만화책 서가에 꽂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신기한 코믹스인가 싶어서 사서 집에 왔다가 펼쳐봤을때읟 당황스러움은 지금도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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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은, 정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파스타와 소스 레시피로 가득 차 있다. 세상에 파스타 종류가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책 서문에 재미있는 구절이 있는데,

이 책의 아이디어는 왜 이탈리아인들은 알맞은 파스타 모양에 어울리는 소스를 찾는데 그렇게도 집착할까, 라고 생각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책 안쪽에는 레시피와 함께 파스타의 모양을 기하학적으로 표현한 도형들이 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저 의문에서 시작해서 파스타 레시피 만으로 이 책을 가득 채웠다. 책 처음에는 파스타를 만드는데 중요한 소금, 지방 등의 재료부터 삶는 방법, 반죽 미는 방법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이 나와 있다. 별 것 아닌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것 만으로 저 사람을 책을 한권 썼다. 기하학적인 파스타 도형들을 보며 와 쩐다 - 하다가 문득 프랙탈 생각이 났다.

그 어느 화두라도 인지의 거리를 조절할 수 있다. 파스타 -> 면 요리 -> 먹을 것, 이런 식으로 시야를 넓혀볼 수도 있고, 파스타 안에서도 빠네에 토마토 소스를 사용한 것으로 한정지어서 썰을 풀 수도 있다. 하지만 범위를 넓혀도, 좁혀도, 그곳을 잘 살펴보면 언제나 충분히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다. 인류의 장대한 역사, 멸종 위기의 동물, 맛있는 김치를 담그는 법, 나의 지난 한달 등 돋보기를 아무리 멀리, 가까이 움직여도 항상 거기엔 정리해낼 수 있는 적당한 정보 조각들이 있다. 너무 방대해서 정리할 수 없는 경우도 없고, 너무 아무것도 없어서 정리할 거리도 없는 경우도 없다.

  1. 세상에 뿌려진 정보는 충분히 조밀하고 (그래서, 무한)
  2. 인간의 인지 필터는 받아들이는 정보의 해상도를 조절하는

두 가지가 만난 결과로 인간이 구성하는 정보 체계 자체도 매우 프랙탈같은 형상이 된 것이 아닐까 한다. 알려진 세상의 울타리 안이 무한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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